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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불어] 0236. 전족을 시작한 업보

눈기러기 2026. 5. 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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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을 시작한 업보 裹足作俑之報

 

항주杭州의 육계陸堦 선생[각주:1] 은 덕행德行이 높아 죽을 때까지 부인 외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배우나 기녀妓女를 불러와서 술을 따르게 하면 좋아하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그냥 무심히 상대했다. 사소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관아에 말을 잘해 달라고 부탁하면 승낙하기도 했다. 관리들은 선생을 존중하였기에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들어 주었다.
어떤 사람이 선생이 본인의 품위를 깎는 일을 한다고 비난하자 선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린아이의 밥이 땅에 떨어지면 주워서 식탁에 올려놓아야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그렇다고 그 밥을 직접 먹을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무릇 사람이 본인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은 사심私心에 불과하다. 나는 일찍이 중승中丞 탕잠암湯潛庵[각주:2] 에게서 배운 바가 있다. 중승이 강소순무江蘇巡撫일 때 소주蘇州에 창기娼妓가 많았지만, 중승은 그저 충고와 주의만 주고 금지하거나 체포하지는 않고, 다른 관리들에게도 당부했다. ‘세상에 창기와 배우가 있는 것은 승려와 비구니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승려와 비구니는 먹을 것을 얻으려고 남을 속이고 창기는 먹을 것을 얻으려고 남에게 아첨하니, 둘 다 선왕先王의 법도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허나 어차피 구양수歐陽修 공의 『본론本論』[각주:3] 을 실행할 수 없는 세상에, 배고프고 춥고 외로워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보듬어 줄 텐가? 지금 창기와 배우를 학대하는 것은 북위北魏 왕조에서 승려를 살해하고 불상을 훼손했던 것처럼 그저 하급 관리들의 재산이나 불려주는 일이다. 나는 뿌리를 바로잡지 않고 가지 끝만 가지런히 정리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


어느 날, 선생의 꿈에 어떤 하인이 초대장을 들고 나타났다. 방문을 청하는 서신 위에는 [연가年家[각주:4]  권제眷弟 양계성楊繼盛[각주:5]  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선생은 웃으며 “나도 마침 초산공椒山公을 뵙고 싶었습니다.”하고 하인을 따라나섰다. 드높게 솟은 궁전에 도착하자 붉은 옷에 검은 관모官帽를 쓴 초산공이 계단을 내려와 맞이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 옥황상제를 모시고 있는데 임기가 끝나 조만간 승진할 예정이라, 이 자리에 공이 와 주셨으면 합니다.”
선생은 사양했다.
“저는 이승에서 양관陽官이 되기에도 재주가 부족하여 은거하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승에서 음관陰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초산공이 웃었다.
“선생은 정말 고매한 분이군요, 성황신 자리마저 하찮게 여겨 맡지 않으십니까.”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어떤 판관이 다가와 초산공에게 귓속말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그 안건은 판결이 까다로우니 옥제께 상주를 올린 뒤에 다시 결정하겠다.”
무슨 사건인지 묻자 대답했다.
“남당南唐의 이후주李後主[각주:6] 가 전족纏足을 시작한 안건입니다. 후주는 전생에는 숭산嵩山의 정명화상淨明和尙이었는데 환생하여 강남국주江南國主가 되었습니다. 궁중에서 연회를 열 때 그의 비 요낭窈娘의 발을 초승달 모양으로 감쌌던 것은 그냥 한때의 장난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뒤 전족이 유행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너도나도 궁혜弓鞋를 신고, 작은 발을 만들겠다면서 부모에게 받은 몸을 비틀고 주물러 억지로 쥐어짜고는 크기를 비교해 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화를 내고 남편은 아내를 구박하면서 남녀 가릴 것 없이 제멋대로 과도한 풍습을 부추겼지요. 결국 어린 소녀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장성한 여인들도 그것 때문에 대들보에 목을 매고 독을 삼키지 않았겠습니까.
옥황상제께서는 이후주가 안 좋은 선례를 만든 것을 못마땅하게 보시어 그의 생전에 송태종宋太宗에게 견기약牽機藥[각주:7] 이라는 독을 받아먹게 하셨습니다. 발은 앞으로 가려 하고 머리는 뒤로 가려고 해서 여자들이 발을 싸매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받게 하고, 그 고통을 다 겪은 뒤에야 비로소 숨이 끊어지게 하신 거지요. 조만간 700년이 다 되어 가고 참회도 충분히 했다 싶어 숭산으로 돌려보내 다시 도를 닦게 할 예정이었습니다.
한데 이번에는 발 없는 여인 수십만 명이 천문天門으로 달려가서 원통하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장헌충張獻忠[각주:8] 이 사천四川을 점령했을 때 저희의 발을 잘라서 산을 쌓고 제일 작은 발을 산꼭대기에 꽂았습니다. 저희 목숨이야 끝날 때가 되었던 것이라 쳐도, 어째서 그 일그러지고 추한 모습까지도 그런 식으로 내보여야 했단 말입니까. 이 어찌 이왕李王이 전족을 시작한 죄가 아니겠습니까? 상제께서는 부디 이왕을 엄하게 벌하여 주십시오. 저희는 그제야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제께서 그 여인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온 세상의 성황신들에게 안건을 전달하여 죄를 의논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공문을 받아 보고서 이건 장헌충이 저지른 죄이고 이후주가 미리 알 수는 없었던 일이므로 이후주에게 죄를 소급적용해서 무거운 벌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여 이후주가 명부冥府에서 신발 백만 켤레를 짜서 발 없는 여자들에게 보상해 주고, 그 수량을 채우기 전에는 숭산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식으로 처벌해 달라고 청하려고 합니다. 상주문의 초안은 완성되었으나 아직 다른 성황신들과 만나 문장을 정리하지는 못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의 풍속은 바로잡기 어려운 법이지요.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제 부모의 시체를 태우고 효도를 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고, 제 딸의 발을 아프게 하고는 자애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는데, 다 비슷한 유입니다.”
초산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은 인사를 하고 나왔고, 아무 일 없이 꿈에서 깨어났다.
그 뒤 초산공은 다시는 선생을 초대하지 않았고, 선생은 천수를 누리다 80대에 세상을 떠났다. 늘 부인에게 웃으면서 “우리 딸아이는 전족을 하지 마시오. 이후주가 음사陰司에서 신발을 한 켤레 더 짜야 할까 걱정되는구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裹足作俑之報
杭州陸梯霞先生, 德行粹然, 終身不二色. 人或以戲旦、妓女勸酒, 先生無喜無慍, 隨意應酬. 有犯小罪求關說者, 先生唯唯. 當事者重先生, 所言無不聽. 或訾先生自貶風骨, 先生笑曰: “兒米飯落地, 拾置几上心才安, 何必定自家吃耶? 凡人有心立風骨, 便是私心. 吾嘗奉教于湯潛庵中丞矣. 中丞撫蘇時, 蘇州多娼妓, 中丞但有勸戒, 從無禁捉. 語屬吏曰: ‘世間之有娼優, 猶世間之有僧尼也. 僧尼欺人以求食, 娼妓媚人以求食, 皆非先王法. 然而歐公《本論》一篇, 既不能行, 則饑寒怨曠之民作何安置? 今之虐娼優者, 猶北魏之滅沙門毀佛像也. 徒爲胥吏生財, 不揣其本而齊其末, 吾不爲也.’”
一日者, 先生夢皂隸持帖相請, 上書“年家眷弟楊繼盛拜”, 先生笑曰: “吾正想見椒山公.” 遂行. 至一所, 宮殿巍然, 椒山公烏紗紅袍, 下階迎曰: “繼盛蒙玉帝旨, 任滿將升, 此坐需公.” 先生辭曰: “我在世間不屑爲陽官, 故隱居不仕, 今安能爲陰間官乎?” 椒山笑曰: “先生真高人, 薄城隍而不爲.” 語未畢, 有判官向椒山耳語. 椒山曰: “此案難判, 須奏玉帝再定.” 先生問何案, 曰: “南唐李後主裹足案也. 後主前世本嵩山淨明和尚, 轉身爲江南國主, 宮中行樂, 以帛裹其妃窈娘足, 爲新月之形, 不過一時偶戲. 不料相沿成風, 世上爭爲弓鞋小腳, 將父母遺體矯揉穿鑿, 以致量大校小, 婆怒其媳, 夫憎其婦, 男女相貽, 恣爲淫褻. 不但小女兒受無量苦, 且有婦人爲此事懸梁服滷者. 上帝惡後主作俑, 故令其生前受宋太宗牽機藥之毒, 足欲前, 頭欲後, 比女子纏足更苦, 苦盡方薨. 近已七百年, 懺悔滿, 將還嵩山修道矣. 不料又有數十萬無足婦人, 奔走天門喊冤, 云: ‘張獻忠破四川時, 截我等足, 堆爲一山, 以足之至小者爲山尖. 雖我等劫運該死, 然何以出乖露醜, 一至于此, 豈非李王裹足作俑之罪? 求上帝嚴罰李王, 我輩目才瞑.’ 上帝惻然, 傳諭四海都城隍議罪. 文到我處, 我判孽由獻忠, 李後主不能預知, 難引重典. 請罰李王在冥中織履一百萬, 償諸無足婦人, 數滿才許還嵩山. 奏草雖定, 尚未與諸城隍會稿, 先生以爲何如?” 先生曰: “習俗難醫, 愚民有焚其父母尸以爲孝者, 便有痛其女子之足以爲慈者, 事同一例也.” 椒山公大笑.
先生辭出, 醒竟安然. 嗣後椒山公不復來請. 壽八十餘卒. 常笑謂夫人曰: “毋爲吾女兒裹足, 恐害李後主在陰司又多織一雙履也.”

  1. 육계陸堦(1619?-1701?)는 자는 제하梯霞이고 절강浙江 전당錢塘 사람이며 육기陸圻와 육배陸培의 동생이다. 명 멸망 후 은거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이후 절강순무의 초빙을 받아 만송산萬松山의 서원에서 강론을 했는데 학생들이 매번 천 명씩 몰려 들었다고 한다. 저서로 『백봉당집白鳳堂集』과 『사서대전四書大全』이 있다. [본문으로]
  2. 본명은 탕빈湯斌(1627-1687)으로 자는 공백孔伯, 호는 형현荊峴, 만호晚號는 잠암潛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하남河南 휴주睢州 사람이다. 평생 청렴경백하고 주자학 이론을 실천하는데 앞장섰으며 백성들을 구제하고 민간의 기풍을 바로잡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1652년 진사가 되고 강소순무江蘇巡撫,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공부상서工部尙書 등을 지냈다. 저서로 『탕자유서湯子遺書』가 있고 『명사明史』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본문으로]
  3. 『본론本論』은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던 구양수歐陽修(1007-1072)의 척불론이다. 불교는 천 년간 중국에 백해무익했으며 혈연을 저버리게 만들고, 부처는 외국인이므로 그의 법을 중원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4. 연가年家는 과거에서 같은 해에 합격한 사람들 간의 호칭이나, 명말 이후로는 굳이 동년 합격생이 아니라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본문으로]
  5. 양계성楊繼盛(1516-1555)은 자는 중방仲芳, 호는 초산椒山, 시호는 충민忠湣으로 직예直隸 용성容城 사람이다. 명 왕조의 저명한 간신諫臣으로 1547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남경이부주사南京吏部主事,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 등을 지냈으며, 1553년 엄숭嚴嵩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투옥당해 사망했다. 저서로 『양충민문집楊忠湣文集』이 있다. [본문으로]
  6. 이후주는 남당南唐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자 시인인 이욱李煜(937-978)이다. 원명은 종가從嘉, 자는 중광重光, 호는 종은鍾隱 또는 종봉백련거사鍾峰白蓮居士이다. 971년 송宋 태조太祖가 남한南漢을 멸망시킨 후로는 ‘강남국주江南國主’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975년 남당 멸망 후 변경汴京에서 포로로 지내다가 978년 사망했다. 서예, 회화, 음악, 시 등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사詞에서 명성을 떨쳤다. [본문으로]
  7. 견기약은 견기독牽機毒이라고도 하며 마전자(호미카, Strychnos nux-vomica)로 만든 독이다. 담을 제거하고 기침을 멈추는 효과가 있으나 과다 복용시 전신 근육의 강직성 경련을 유발하고 심장마비, 뇌손상 등을 일으킨다. [본문으로]
  8. 장헌충張獻忠(1606-1647)은 자는 병충秉忠, 호는 경헌敬軒, 외호外號는 황호黃虎로 섬서陝西 연안부延安府 사람이다. 명말에 기의한 농민군 수령 중 하나로 1643년 대서왕大西王을 자칭하고 1644년에 사천四川을 공격하여 대서정권大西政權을 세워 연호를 대순大順으로 정했다. 1647년 청清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