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수지嵇受之에게 감사한 측천무후 武后謝嵇先生
무석無錫 출신인 시독侍讀 혜수지嵇受之는 내가 가르친 제자였다. 신축년辛丑年(1781) 겨울, 내가 사는 수원隨園에 들렀기에 붙잡고 술을 권했다. 술자리에서 역사를 논하다가 내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실린 양귀비楊貴妃의 세아식洗兒式1이 허황된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혜수지가 말했다.
“제가 사국史局에 있을 때 『당감唐鑒』2을 편수하러 파견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지금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의견을 제시해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음란하고 외설스러웠다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대부분 제외했습니다만, 같은 사국 동료들은 제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더군요. 얼마 후에 서사書舍에서 잠이 든 날 밤, 웬 환관이 오더니 ‘측천황태후則天皇太后께서 혜嵇 선생先生을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따라 갔더니 궁전이 나타났습니다. 바깥에는 높이가 수십 장은 될 금기둥 네 개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데, ‘천추天樞’3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요. 짙은 검은 머리에 노을 무늬 옥패를 찬 궁녀가 나와서 궁전 서쪽 구석으로 안내하고 ‘선생은 잠시 앉아 계시지요. 제가 아뢰는 동안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더니 바로 자리를 떠났습니다. 전상殿上은 문턱이 굉장히 높아서 넘어가려면 상당히 힘들 것 같았고, 수놓은 주렴 너머에 면류관을 쓴 사람이 앉아 있긴 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올려다 보아도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쪽에서 마치 연꽃 같은 느낌의 신기한 향기가 불어 왔습니다. 그 옆에는 호랑이 가죽으로 덮은 의자가 있고 수염이 하얀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손에 상아로 된 홀笏을 들고 상주를 올리느라 낭랑한 목소리로 수천 마디를 말했지만 역시 알아들을 수는 없더군요. 면류관을 쓴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따져 묻는 것 같더니 잠시 후 크게 웃었는데 옥처럼 깨끗하고 새하얀 이가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얼굴은 면류에 가려져서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아까의 궁녀가 나오더니 말했습니다. ‘오늘은 이미 늦어 태후께서 만나 보실 시간은 없으시다 하니 선생께서는 돌아가십시오. 부름을 받으신 이유는 선생께서 『당서唐書』를 제외하느라 힘써 주신 공에 감사를 드리고자 함이었으니, 이는 선생께서도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옥저울 하나를 꺼내서 ‘제가 장안長安에서 천하의 재능을 헤아릴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조만간 장안에 가실 터이니 삼가 올립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궁녀가 상관완아上官婉兒4라는 것을 눈치채고 공손히 인사를 한 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해에 과연 섬서陝西 지역에 과거 시험을 관리하는 독학督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 武后謝嵇先生
無錫嵇侍讀受之, 余授業弟子也. 辛丑冬, 過隨園, 余止而觴之. 席間論史事, 余極言《通鑒》載楊妃洗兒事之誣. 嵇云: “門生在史局時, 派修《唐鑒》, 立論頗合先生之意, 將《舊唐書》所載武后淫穢事, 大半刪除, 同局以爲不然. 亡何, 夜卧書舍, 有小黃門來, 稱則天皇太后請嵇先生. 因隨之行, 望前面宮殿外有四金柱插空, 高數十丈, 上書‘天樞’二字. 一宮女雲鬢霞佩出, 引向殿西角, 云: ‘先生少坐, 待我奏聞.’ 語畢便去. 殿上門檻甚高, 跨殊費力. 綉簾中坐冕旒者, 相離遠, 仰視不甚分明. 異香從殿上吹來, 仿佛蓮花氣息. 旁有虎皮交椅, 坐白鬚人, 手執牙笏, 口奏事, 琅琅數千言, 亦不可辨. 冕旒者似與駁詰良久, 已而大笑, 其齒皓然呈露, 潔白如玉. 面爲旒珠所遮, 終未見也. 少頃, 前宮女出, 謂曰: ‘今天已暮, 太后不及相見, 請先生且回. 所以奉屈者, 謝先生駁刪《唐書》之功, 先生當自知之.’ 語畢, 袖中出一玉秤, 曰: ‘此我在長安以之稱量天下才者, 先生將往長安, 敢以奉贈.’ 門生心知是上官婉兒, 逡巡揖謝而醒. 其年果有督學陝西之差.”
- 세아식洗兒式은 본래 아기가 태어났을 때 출생 후 사흘째 또는 한달째 되는 날 아기를 씻기는 풍속이다. 당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0년(751), 안록산安祿山(당시 48세)이 양귀비(당시 32세)의 양자로 들어가자 양귀비가 안록산의 생일 사흘 뒤 세아식을 열어 안록산을 씻기고 강보로 감싸 주었고, 이를 들은 당현종(당시 66세)이 기뻐하며 세아전洗兒錢을 하사했으며, 이후 안록산이 후궁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양귀비와의 사이에 추문이 생겨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 송宋 범조우范祖禹가 편찬한 역사서이다. [본문으로]
- 당唐 연재延載 원년(무주천책만세원년武周天冊萬歲元年, 695)에 무측천이 본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기둥으로 “대주만국송덕천추大周萬國頌德天樞”라고도 한다. 동과 철을 섞어 주조했으며 높이 105척, 지름 12척, 무게 200만 근의 팔각 기둥으로 산과 용, 기린, 선인 등으로 장식하고 백관百官과 사방 이민족의 추장명酋長名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개원開元 2년(714)에 황제의 명으로 부순 뒤 천추 제작의 실무를 담당한 페르시아로 보냈다. [본문으로]
- 상관완아上官婉兒(664-710)는 상관소용上官昭容이라고도 한다. 섬주陝州 출신으로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무측천武則天 때 정치의 중대사를 많이 결정하였기에 “건귁재상巾幗宰相”으로 불렸다. 중종中宗 때 소용昭容으로 봉해졌고, 조정을 대표하며 천하의 시문을 품평하기도 했다. 810년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훗날의 당현종唐玄宗)가 정변政變을 일으켰을 때 살해당했다. 시호는 혜문惠文이다. [본문으로]